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중앙신문/ 허제비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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작성자 김성한 작성일17-11-09 20:13 조회6,432회 댓글0건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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    중앙신문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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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 허제비​

 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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김성한(수필가, 본지칼럼위원)

시월의 끝자락, 온 산야가 울긋불긋 불타오른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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어느 시인이 말했던가.‘버려야 할 것을 아는 순간 나무는 가장 붉게 제 몸을 태운다.라고.

 

내 가슴 속에도 불덩이 하나를 삼킨 듯 뜨거움이 번진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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해거름 녘, 집 앞 사그내 둑길을 걷는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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​거랑(川) 너머 빤히 보이는 논에는 앞니가 듬성듬성한 콤바인이 게걸스럽게 나락(벼)을 먹으며 걸어간다.

 

뒤꽁무니에는 볏짚들이 툭툭 튀어나온다. 볏짚 덩어리가 질퍽한 논바닥에 널브러져 있다.

 

얼마 전까지만 해도 모개미에 알곡을 조롱조롱 매달고 있던 저 볏대.

 

이듬해 농사의 밑거름이 볏짚인데도 지금은 천덕꾸러기 신세가 돼버렸다.

 

번지르르하게 성공한 이 뒤에는 저 볏짚처럼 자양분이 되어준 등 굽은 부모님이나, 허리통 굵은 아내가 있었으리라.

 

그러나 출세하고 나면 저 혼자 잘나서 된 양 경망을 떠는 이도 있다.

 

알곡만 쏙 빼먹고 뒤뚱거리며 걸어가는 저 콤바인처럼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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들녘 외딴집 앞에 이른다. 아래채 가마솥 아궁이 앞에서 허리 구부정한 노파가 솔가지를 태우고 있다.

 

굴뚝에는 푸르스름한 연기가 머리를 풀어헤치고 하늘로 올라간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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문득 사십 년 전에 영면하신 어머니 얼굴이 떠오른다.

 

그 옛날 가을걷이가 한창인 이맘때이면 어머니의 무명옷 소맷자락에는 솔가지 타는 냄새가 배어 있었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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​툇마루 위 빨랫줄에는 목이 잘린 채 축 늘어진 무청실가리가 걸렸다.

 

뒤란에는 대처에 나가 사는 자식들에게 나눠줄 김칫독이 묻혀 있으리라.

 

자식 낳아 젖 물리며 키우다 보니 살결은 꺼멓게 변하고, 뼈에는 구멍이 숭숭 나버린 우리 어머니들.

 

내리사랑은 끝이 없는 모양이다. 늙은 부모의 자식 사랑이 안마당에 일렁인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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​가을바람 한 자락이 들녘 가운데로 자맥질해온다. 공기가 서늘하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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​찬 공기가 옷 사이로 비집고 들어온다. “옷을 껴입고 가세요.” 아내의 말을 들었어야 하는 건데.

 

“당신 하는 모양새가 늘 그렇지 뭐.” 입 삐죽거리는 아내의 잔소리가 귀에 앵앵거린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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벌거벗은 들녘에는 해진 치마저고리를 입은 허수아비가 찬바람에 떨고 있다.

 

지난봄 맞춰 입은 하얀 저고리에 까만 치마가 너덜너덜하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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​주인은 지난 한 철 참새 떼 쫓는 허수아비의 수고로움을 잊었는가?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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​‘토끼사냥이 끝난 사냥개는 삶아 먹는다.’라는 토사구팽(兎死狗烹)이 따로 없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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어릴 적 많이 들었던‘허제비'라는 말이 떠오른다.

 

제구실을 못 한 채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사람을 빗대어 일컫는 방언이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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나는 몇 해 전 사십 년 가까이 다니던 직장에서 퇴직했다. 퇴직하고 집에서 쉬니까 처음 얼마 동안은 솔직히 편하고 좋았다.

 

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으니 그게 아니었다. 모두 바쁘게 살아가는 데 나 혼자만 소외된 삶을 사는 것

 

같기도 했다. 시간이 지날수록 그토록 자주 울어대던 휴대전화도 벙어리저금통처럼 입을 꾹 다물고 있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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차츰차츰 외톨이가 되어 갔다. 뼈저리게 외롭다는 생각이 들자 서글퍼지기까지 했다.

 

살갑게 대하던 마누라도 전 같지 않다. 있는 돈 없는 돈 다 긁어모아 장가보낸 자식들도 제 어미 하고만 이야기한다.

 

어쩌다 이야기라도 거들라치면 피하는 눈치다. 내가 저 허제비 일까?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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빈 밭에는 한 노파가 저무는 해를 등에 진 채 깻단을 털고 있다.

 

저 멀리 산등성마루 위에는 온종일 대지를 달구던 해가 턱을 괴고는 눈을 찡긋한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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“백수 양반! 저 울긋불긋한 산을 보세요. 그게 나무 생에서 가장 찬란한 때입니다.

 

은퇴한 당신, 지금이야말로 저 단풍처럼 생의 가장 찬란한 때입니다. 당신은 결코 허제비가 아닙니다.”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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한마디 던지고는 산등성 너머로 숨어버린다. 저녁노을이 서녘 하늘을 벌겋게 물들이고 있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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“그렇지 어깨에 짐을 벗어버린 지금이 내 생에서 가장 좋을 때 일 거야.”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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집으로 돌아오는 발길이 한결 가볍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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